2023. 10. 3. 00:39ㆍWriting
1. 겸손은 최고의 미덕(美德)일까?
겸손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낮추고 상대의 위
치를 높이는 행위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흔한 겸손의 가르침이 최고의 미덕으로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로마 시대였다. 특히,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매우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요즘은 당연시 되는 I. 법적 보호와 권리 II. 정치적 참여 III. 재산권 등은 이들이 영향력을 가진 이유이자 특권이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 유지과 강화와 권위의 강조로 이어지는 유의미한 도덕률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론의 수사학들이 발생되었고 진리라는 목표를 위해 논리적 입증과 사유의 방법들이 개발되고 주장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 입증은 곧 내 존재에 대한 선언이었으며, 스스로가 누구보다 존중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한다고 말해야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이 시대가 추구하는 도덕률의 상태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지도층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 자신의 지지층으로 사용하여야 했다. 따라서 소피스트(Sophist)라는 궤변론자들을 고용하거나 돈을 주고 좋은 가르침과 언어적 논리, 주장을 만들어 부도덕적 행위나 올바르지 못한 행위 조차도 정당화를 위해 화려한 언변과 교묘한 설득의 기술로 앞으로 나아가야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노예들에게 강요되는 도덕률, 즉 겸손이었다. 사회적 질서와 지위를 유지시키고 사회적 관행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당연했다.
2. 겸손을 행하는 바울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주며‘ (엡 4:2) 예수의 사도인 바울의 사역은 로마에서 행해졌다. 그가 가르친 겸손이라는 도덕적 가르침은 당시 매우 혁명적이었고, 그런 가르침을 듣고 제안하는 바울의 말은 어쩌면 로마인들이 듣기에는 상당히 모욕적이고 황당했을 것이다.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과 영향력이 컸고 자신을 따르는 지지층과 노예들이 많은데도, 자신에게 겸손하라는 말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바울은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갖고 태어났으며, 심지어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교육으로 성경의 전통과 규례를 공부하였고, 그의 가족은 상업에서 큰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바울은 겸손의 가르침을 행했을까?
그 이유는 바울의 두 눈으로 본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을 그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3. 예수, 제자들의 발을 닦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던 시기와 장소는 대게 중동 지역으로서 모래와 사막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특히, 외출을 하고 온다면 다리는 더러운 먼지와 사막의 모래가 가득 끼여있었다고 한다. 만약 손님이 집에 방문할 경우, 그들의 발을 닦아주는 사람은 그 집의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만약 노예가 부재일 경우엔 그 주인이, 그리고 그 주인도 부재일 경우 첫 번째로 들어온 손님이 닦아주는 관례였다. 혹시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만찬을 즐기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예수는 제자들과 만찬을 즐기기 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들어왔을 당시, 그 집에는 노예가 부재하였고 제자들은 서로간 눈치를 보며 서로의 발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방 안에서 물과 수건을 두른채 나와 예수는 열 두명의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시민권과 정치적 야욕 등 모두의 속내는 달랐지만 예수의 겸손은 바울을 감명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교회의 역할과 공동체적인 문제와 유지를 위해 항상 겸손을 강조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가 그렇게 행했기 때문이었다. 겸손이 흔치 않고, 어쩌면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나로선, 자신을 낮추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겸손에 관한 가르침의 요지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과 성경의 뜻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무조건적인 재물과 세상적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물질적이고 변태적인 것 조차도 존중해야한다며 이상한 도덕 그 자체만을 위한 행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작고 낮은 나에게 풍성한 은혜 주어 스스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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