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비트겐슈타인의 불태우지 못한 일기(2/4)

2020. 10. 22. 20:43L. Wittgenstein

사진: 비트겐슈타인의 노트, 비트겐슈타인 문헌보관소 소장

 

“내 일기장과 노트들은 제발 부탁이니 불쏘시개로만 쓰십시오. 매일 2-3장씩 난로에 불을 붙이는 데 사용하면 금방 다 쓸 수 있을 겁니다. 활활 잘 타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없애버리세요!”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전쟁일기》는 비트겐슈타인이 1차세계대전 참전 중에 기록한 노트 세 권을 묶은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자필 원고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의 초기 사유에서 논리철학적인 사상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경험하게 해주는 가치 있는 사료인 동시에, 젊은 비트겐슈타인의 내밀하고 진솔한 자기관찰이 담긴 일기장이기도 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를 만난 건축가 파울 엥겔만은, 비트겐슈타인이 전쟁 중에 쓴 노트를 바탕으로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한 뒤 이 노트를 모두 파괴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과 달리 노트의 일부는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논리철학논고》 출판 과정에서 본문 검토와 서문 작성을 맡은 러셀은 노트들을 넘겨받아 이 난해한 작품을 해석하는 데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노트를 폐기하길 바랐고, 과거의 초고나 일기를 여러 번 불태웠습니다. 그럼에도 세 권의 노트가 살아남아 이 책으로 엮이게 된 것은 기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왜 이 기록을 없애려 했을까요? 스스로 “최종적이고 범접할 수 없다"고 느낀 《논리철학논고》에 비해 모순과 오류가 담긴 이 초고는 불완전해 보였을 것이고, 이 기록물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장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적인 일기'들은 독일에서도 부분적으로만 출간되었고, 읻다의 이 책처럼 사적 일기와 철학적 노트가 함께 출판된 적은 없었습니다. 20세기의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일개 이등병으로 참전한 인간 비트겐슈타인의 간극이 오랫동안 메워지지 못했던 것입니다.